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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양》: 말하지 않고 사랑하는 존재에 대하여 《애프터 양》: 기억과 감정 사이, 조용한 연결의 이야기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은 조용하고 느린 흐름 속에 깊은 감정과 철학을 담아낸 작품이다. 안드로이드 ‘양’이 고장 나면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가족, 기억, 존재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건넨다.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말하고, 거대한 서사보다는 소소한 장면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드는 영화다. 일사불란한 리듬 속 균열의 시작 — 유쾌한 첫 장면에 숨겨진 질문《애프터 양》은 아주 이례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면 고정 카메라 앞에서 네 명의 가족이 일제히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펑키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형광빛 조명, 절도 있는 안무, 생기 있는 색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따뜻하고 유쾌한 가족 영화인가?”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더보기
[이터널 선샤인], 지워도 남는 마음에 대하여 기억을 지운다는 상상,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을 지운다는 상상만으로도 이미 마음을 끌어당긴다.사랑을 잊는다는 건 무엇일까,그리고 잊는다고 해서 정말 사라지는 걸까.이 영화는 단지 한 연인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사랑과 이별, 상처와 회복, 그리고 망각이라는 주제를직선적인 서사가 아닌, 감정의 파편과 기억의 흐름 속에 비선형적으로 펼쳐 보인다.‘기억을 지우면 사랑도 함께 지워질까?’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했지만,수업을 함께한 우리는 곧 알게 되었다.《이터널 선샤인》이 진짜로 묻고 있는 건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조심스럽고, 인간적인 질문이라는 것을.사랑이 지나간 자리, 기억은 어디에 남는가조엘은 어느 날 클레멘타인의 기억이 자신에게서 지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더보기
[미디어 교육 후기]질문이 만든 반전: 중학생과 함께한 《12인의 성난 사람들》 ‘재미있는 수업’은 꼭 게임처럼 자극적이어야 할까? 오늘 나는 그 질문에 명확한 ‘아니오’를 들을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과 함께한 미디어 리터러시 수업,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통해 "질문하는 힘"을 체감하는 시간이었다.이날의 수업은 법정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의 일부 장면을 기반으로 학생들이 배심원이 되어 ‘소년의 유죄 여부’를 판단해보는 시뮬레이션 활동으로 구성되었다. 영화가 1957년에 제작된 흑백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지루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왜 그 사람만 서 있을까?", "왜 포스터 중앙에 칼이 있지?" 같은 질문으로 수업 시작부터 흥미를 드러냈다. “소년은 유죄다” – 처음의 판단수업의 1차 활동은 영화 초반 6분 44초를 시청한 후, 각자의 역할.. 더보기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내 안의 콤바인을 꺼내다 조용한 병동, 더 조용한 사람들 1975년, 체코 출신의 감독 밀로스 포먼은 켄 키지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표면적으로는 한 정신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사실은 사회가 정한 '정상성'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식으로 인간이 억눌리고 침묵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정치적 은유이기도 하다.이 작품이 탄생한 1960년대 미국은 뇌전두엽절제술(lobotomy)이 여전히 정신의학적 처치로 사용되던 시기였다. 개인의 감정적 충동이나 반항적인 성향은 치료의 대상이 되었고, ‘고요하고 순응적인 상태’는 회복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의학적 조치들은 때로 환자의 목소리와 정체성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했다.소설과 영화는 이 같은 의료와 권력의 결합에 날카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더보기
[미디어 교육 후기]그림으로 전한 소식, 마음으로 느낀 미디어 2025년 봄, G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과 함께한미디어 리터러시 첫 시간에는 ‘미디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소통의 본질과 미디어의 변화를 탐색해보았다. 이 수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미디어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만드는 매개로서 미디어의 역할을 학생들이 직접 체감하도록 구성되었다.핵심 활동은 “옛날 사람처럼 소식 전해보기”였다. 학생들은 3인 1조로 모둠을 구성하고, 각 조는 글이나 말 없이 그림으로만 특정 소식을 전달해야 하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주어진 미션은 일상적인 사건이나 감정을 담은 것이었고, 이를 서로 패들렛(Padlet) 플랫폼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한 후, 다른 조가 해당 그림을 보고 그 의미를 추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이 과정은 단순한 미술 수업.. 더보기
〈노래로 쏘아올린 기적〉, 내 목소리의 반경을 넓히다 총알보다 멀리 가는 노래― 3월 성인 영화비평,《노래로 쏘아올린 기적》을 다시 보다3월의 영화비평 수업을 준비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이 시기에 이 영화를 보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랍권 음악 오디션에서 우승한 팔레스타인 청년의 성공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 삶의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을까?왕성한 사회참여를 유도하거나 감정적 연민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이 영화를 사람이 어떻게 절망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지켜내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보고 싶었다. 무함마드 아사프가 거쳐온 여정은 단지 가자지구의 소년이 세계 무대에 선 성공기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세계 속에서, 그래도 노래하고 싶다는 감정의 외침이었다.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도록 가슴이 .. 더보기
[유아 교원 대상 미디어 교육 연수 후기]“도구를 넘어 의미로: 유아 미디어 교육, 교사의 태도에서 시작되다”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유아 미디어 수업, 가능성과 의미를 찾는 시간" 2025년 4월 16일, 평택 P유치원에서 유아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 교육 연수가 진행되었다. 이 연수는 단순히 몇 가지 디지털 도구를 소개하고 활용법을 익히는 차원을 넘어서, 교사들이 미디어를 ‘교육적 경험’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확장하고, 유아교육 현장에 어떻게 창의적으로 접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연수는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유아 미디어 수업”이라는 주제로, 유아 발달 특성과 실제 현장의 요구를 반영한 콘텐츠로 구성되었다. 교사들은 평소 미디어 교육에 대해 막연한 관심은 있었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방향을 알지 못했다는 공통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연수는 이러한 질문.. 더보기
“〈중경삼림〉, 감정의 유통기한을 걷다” 중경삼림》, 도시의 감정을 걷는 법— 성인 대상 영화비평 수업을 마치며“슬픔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요?” 4월의 성인 대상 영화비평 수업에서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1994)을 함께 나누었다. 이 영화는 사랑에 실패한 두 남자와 감정을 숨긴 두 여자의 이야기이지만, 단순한 로맨스 그 이상이다. 1990년대 반환을 앞둔 홍콩, 불안정한 도시의 기류 속에서 왕가위는 감정을 구조화하지 않고 흐르게 한다. 관객은 이 영화 속에서 질문도 정답도 없이, 감정의 흐름과 흔들림을 체험하게 된다. 두 개의 이야기, 한 도시의 감정《중경삼림》은 서로 다른 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경찰 223호(금성무)는 연인과 이별한 후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일 사 모으며 감정을 붙잡는다. 경찰 663호(양조.. 더보기